출간작 소개

추락한 곳은 낙원 출간 후기 (스포일러 포함)

원더드림 2022. 3. 9. 19:07

 

  • 출간일 : 2022년 2월 9일
  • 분류 : 전연령 장편 로맨스판타지
  • 출간 플랫폼 : 시리즈 (링크)

 

 

 

- 잡담 (작품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와 매우 스압이며,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PTSD, 농업/원예 묘사 등 고증을 많이 필요로 했던 데다가

한창 집필하던 중 생애 첫 수술까지 하게 되어 여러 애환이 담긴 작품이에요.

그럼에도 제가 늘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원없이 쓴 덕에 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저는 '자연으로부터 치유받는 인간'이라는 소재를 참 좋아했습니다.

어릴 적 좋아했던 동화도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같이 자연 속에서 행복해지는 이야기였고,

지금도 마음이 복잡해지면 교외로 나가는 편입니다.

이 때문에 각기 다른 상처를 지닌 등장인물들이 자연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시놉시스가 자연스럽게 탄생했습니다.

 

여러 시련 중에서도 남주에게 굳이 전쟁 후 트라우마(PTSD)를 겪고 있다는 설정을 부여한 데에는,

몇 년 전 우연히 접했던 <더 퍼시픽>이라는 드라마가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드라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군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망가져 가는지를 굉장히 잘 묘사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스내푸와 유진

 

원래도 PTSD라는 증상에 대해 이름이나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었지만, 영상화된 구현물은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이때 받은 깊은 충격이 에이든 피츠로이라는 인물을 구상하는 데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어요.

 

다만, 이런 인물상을 그리는 일이 로코만 줄창 써오고 좋아하던 저에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댓글란에도 적었지만, PTSD라는 증후군은 군인뿐 아니라 트라우마를 겪은 다양한 사람들(교통사고, 자연재해, 성/가정/학교폭력 피해자 등등)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장애(Disorder)입니다.

가볍게 다룰 수 없다는 내용이니만큼 조사가 필요했고, 다행히도 군인들이 겪는 PTSD를 다룬 다양한 영상과 책들이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 증후군을 경시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도덕 교과서나 다큐 같지 않을 수준으로 웹소설이라는 포맷 안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더욱 깊어지기도 했지요.

 

최대한으로 노력해본 것이 이번 작품이고, 또 이런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도 많은 조정을 진행했어요.

대표적인 예로, <추락낙원>의 최초 원고 속 에이든은 다소 진지하고 과묵한, 괴팍한 남자였고

안제는 정말로 못 말리는, 외모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패리스 힐튼st의 공녀였습니다.

(심지어 당시 제가 달았던 태그는 #몸정>맘정... 약간의 혐관도 좀 넣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80화 넘게 그들은...)

 

그렇지만 독자들이 좀 더 인물들에 감정이입하기 쉽도록,

또 인물들이 지닌 어두운 배경에 너무 압도되어 지치지 않도록 가벼운 톤으로 수정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어요.

(출판사 담당자분들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여 에이든은 상처를 안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랑 받고 자라 유머와 정도를 아는 남자로,

안제는 철없지만 그래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아가씨로 고친 것이 지금의 <추락낙원>입니다.

아직 미숙한 글솜씨라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래도 수정 과정에서 밸런스를 좀 더 잘 맞추게 된 것 같아요.

 

아쉬운 점이라 하니 하나 더 생각나는 부분은,

원래는 정말 고증을 철저하게 지킨 빅토리아 시대물을 그려내고 싶었거든요.

(애초에 안제의 특징이 '괜찮은 귀족 남성과의 결혼을 위해, 꽃으로 존재해야 하는 영애들의 삶이 과연 행복하기만 했을까? 다른 방식의 행복은 없을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데 당대의 시대상을 조사하려고 문헌을 보다보니 '귀족'이나 '왕족',

나아가 그들을 보필하는 '집사/하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료들이 남아있지만

제게 필요한 '농부' 등의 평민들에 대한 자료는 정말 찾기 어렵더라고요.

(하긴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주로 화려한 삶이고, 후대에 자료로 남는 것도 그쪽이겠죠... 혹시 이런 자료를 어디에서 찾는지 아시는 분은 저에게 슬쩍 연락을...)

그~나마 조금 자료가 있는 것은 유튜브의 여러 재현 영상이었지만, 19~20세기 농사철이나 농법에 대한 심도 있는 텍스트 자료는 정말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영국 농부의 농법과 가드닝 캘린더를 참고하여 써보자, 하고 조사를 시작했는데

한국인들(저 포함)이 잘 모를만한 야채나 과일이 너무 많이 나오고,

같은 영국이어도 지역에 따라 온도가 다르고 농사 시기가 다르니 자료마다 하는 얘기가 다르고,

농법에 따라서도(정확히는 온실 유무) 얘기가 너무 다르고... 으아아아...

 

보다 현실적인 묘사를 위해 직접 옥수수 수확 체험을 가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탄생한 61화)

 

고증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수록 글에 제약이 너무 많이 생기고

(가령 고증대로 쓰려면 영국 내에서는 온실 없이는 오이를 키울 수 없어 오이가 들어가는 요리는 작중에서 모두 제외해야 하는 식),

그것이 글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상황으로 이어지더군요...

게다가 19세기의 위생 시설을 그대로 재현하면 남주와 여주의 인권도 저 먼 하늘 나라로 가지요... (수도 시설이라든가.. 위생관념 등...)

 

결국 과감하게 '빅토리아+에드워디안 풍'의 가상 세계를 만들고,

흥미로운 근대 시대의 요소요소를 본따 '핍진성'을 지키는 것으로 제 자신과 타협을 보았습니다. 

 

픽션인 이상 글의 재미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고증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구나 하는 교훈을 이번 기회에 얻었습니다. 

이 때문에 글을 쓰고 수정하면서 시대상에 대한 꽤 많은 부분을 덜어내기도 했어요.

(고증뽕에 차서 넣은 TMI라든가, 지나치게 길고 상세하여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축제 정경/바베큐 묘사라든가.)

 

 

아, 더불어 표지에 나오는 오브젝트에는 하나하나 의미가 담겨 있답니다.

 

트위터에서도 언급했지만 (링크)

안제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풍성한 웨딩드레스를 본땄습니다.

착용한 악세사리는 작중에도 나오듯 모조 루비이며, 이는 황실에 대한 그녀의 미련을 의미합니다.

 

에이든이 입은 군복은 원래 정말 평민 Feel 가득한 갈색 군복(....)으로 부탁 드리려다가 동료 작가님들로부터 GANZI가 없다는 어마어마한 질타를 받고 무난한 검+빨 군복들을 레퍼런스로 드렸습니다. 

설정 상 가슴 부근에는 꼭 흉터가 보이도록 해달라는 요청도 드렸어요.

 

안제는 장갑을 끼고 있는 반면 에이든은 맨손인데 이는 안제가 아직까지 사교계나 수도와 같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 에이든은 그에 비해 자연에 좀 더 가까운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안제가 에이든에게 거짓말을 하며 관계가 시작되었지만, 에이든은 좀 더 본심에 가깝게 관계를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또한, 그들 앞에는 땅바닥에 화려한 왕관과 총, 메달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데요.

여기에는 일부러 낡고 녹슨 느낌의 처리를 부탁 드렸습니다. 

그들을 얽매여 왔던 과거(안제에게는 왕관, 에이든에게는 총과 메달)가 자연 앞에서는 무의미해지거나 잊혀질 수 있다는.... 그런 연출을 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까다로운 요청 사항을 너무나 잘 들어주신 옌코님 덕분에 정말 멋들어진, 그리고 제가 바라던 의미가 다 담긴 표지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 인사 드립니다.

 

그리고 한글 타이포 경우, 아무래도 일러스트 안에 많은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깔끔하게 작업 요청 드렸고 

(제목 자체가 종이책에 가까운, 고전적인 느낌이기도 했고요.)

'낙원'자에서 빛이 반짝이는 효과를 꼭 넣어달라고 부탁 드렸어요!

 

한글 타이포 제목 뒤쪽의 영문 제목은 'A Marvelous Morganatic Marriage'로 '근사한 귀천상혼'이라는 뜻이랍니다.

'귀천상혼'이라는 말은 가문의 격이 다른 자와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공녀인 안제와 준귀족(사실상 평민에 가까운) 에이든의 상황에 들어맞는 표현이죠.
(본인 기준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과의 결혼은 낙혼(落婚)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추락낙원>과 어울리는 단어이지 않나요?)

이 영한문 타이포 역시 잘 어울러지게 작업해 주셔서 받아보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제가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을 쓰느라 전작 대비 자신감이 없던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좋아하는 소재라서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컸던 만큼, 제 실력(및 경험)과 욕심 사이의 괴리가 커서 쓰는 내내 '이게 정말 재밌나?'와 같은 의문을 계속 품게 되더라구요.

출판사와의 교정 작업을 모두 마친 후, 아이패드로 원고를 옮겨 마지막으로 탈고 작업을 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엇, 이거 재미있네?'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제서야 '이 글을 쓰길 잘 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소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제가 편히 쓸 수 있는 안전 지대에서 한 걸음 나아간 덕에 많이 성장할 수 있던 작품 같아요.

마치 자신만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성장한 안제와 에이든처럼요.

 

앞으로도 다양한 소재, 다양한 즐거움으로 독자분들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기작도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작품에 참고하기 위해 집에서 직접 기르던 나팔꽃들... 너무 훌륭하게 자라는 바람에 나중에는 처치 곤란해졌습니다